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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영남권

봉화 청량사 / 음악 늑대와 함께춤을...

by 창 포 2008. 8. 22.

 

 

청 량 사

 

 

  

 

 

 

 

 

 

 하늘다리를 다시건너...

 

 

 

 뒷실고개까지 와서는 청량사로 내려가고... 

 

 

 

 내려가는 나무계단이 약간 가파르지만  설치가 잘되어있음.

 

 

 

 하늘다리에서 청량사 입구까지 얼마나 빨리왔는지 시간을보니 25분이 소요되었네...ㅎ

 

 

 

 

 

 

 

 

 

 삼각우총 소나무와 5층 석탑

 

 

 

 

 

 

 

 

 삼각우총 소나무와 5층 석탑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는 세 개의 굵은 가지가 뻗어 있는 소나무와 하얀 5층 석탑 있다.

   이 소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즉 옛날 청량산 부근 명호면 북곡리 마을의 남민(南敏)이라는 농사꾼의 집에 뿔이 셋 달린 소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송아지가 쑥쑥 자라 낙타만한 큰 소로 자랐으나 성질이 사납고 힘이 세어 부릴 수가 없었다.

이 소문을 듣고 당시 청량사 건립을 주관하던 스님이 소 주인을 찾아가서 그 소를 시주하라고 했단다.

그러자 농사꾼은 부릴 수도 없는 소니까 선뜻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 소를 절 짓는 일에 투입하자 순순히 말을 잘 듣고,

열심히 일을 하여 목재와 돌을 실어 날랐다.

워낙 힘이 센 소라서 몇 년 걸려야 지을 집을 몇 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자마자 그 동안의 심한 작업에 지쳤던지 소가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이에 죽은 소를 절 앞에 묻어주었더니 그 무덤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면서 가지가 셋으로 뻗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죽은 소의 넋이라 생각하여 삼각우총이라 한다. 

 

 

 등산로 오름길

 

 

 

 

 

 

 

 

 

 

 

 

 

 

 

 

 

 

 

 

 

 

 

 

 

 

 

 

 

 

 

 

 

 

 

 

 

 

 

 

 

 

 

 

 

 

 

 

 

 

 

 

 

 

 

 

 

 

 

 

 

 

 

 

 

 

 

 

 

 

 

 

 

 

 

 

 

 

 

 

 

 

 

 

 

 

 

 

 

 

 

 

 

 

 

 

 

 

 

 

 

 

 

 

 

 

 

 

 

 

 

 

 

 

 이 산허리 길이 호젓하고 편안해서 걸어 내려가면서 그 분위기를 졸시 「청량산」에 담아 보았다

 

 

청 량 산    이덕호님.

 

청량산 육육봉

열두 봉의 맏형처럼 은근한 축륭봉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자소봉

내 자리가 이 골짝의 중심이라고 으스대는 탁필봉


그러나 

외관이 잘 생긴 연화봉, 향로봉이 뒤지지 않으려 하고

자란봉, 선학봉도 나서려 하니


그래도 내가 가장 윗전인데 하고 장인봉이 눈을 흘기고

멀리서 김생굴, 오산당을 품고 있는 경일봉이

나도 여기 있소 하네


이렇듯 청량산 열두 봉이 꽃잎처럼 감싼

그 가운데 수술 자리에 청량사가 있고

금탑봉 아래 응진전은 밖에서 손님을 맞는다


총명수 한 잔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봉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모습이니

자장율사가 이르기를

“아! 여기가 청량산이거늘” 했겠지


유리보전 앞뜰의 삼각우총

소나무 한 그루 호젓이 서 있고

그 옆의 5층 석탑은

한낮의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니

청량산엔 문자향 서권기가 다 서려 있네

 

 

 

와라바라 같이 산행하신 이덕호님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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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과 사진은 아미산님.  불로그에서 옮김.

 

이런 길지 중의 길지를 고를 수 있었다는 것은 풍수지리설이 신라 말 도선국사에 의해 비로소 도입되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게 한다.

이미 신라 중기에 원효대사가 청량사를 처음 지을 때 이런 명당을 골랐다는 것은 그 때 벌써 지리풍수에

 대한 안목이 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청량사에는 진귀한 보물 2점이 있다. 하나는 ‘琉璃寶殿’이라는 공민왕 친필의 현판이고, 다른 하나는 유리보전 안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 지불(紙佛)이다. 유리보전이란 동방유리광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를 모신 전각이란 말로서 청량사의 정전이고, 그 안을 들여다보면 양 옆으로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이 협시해 있는 가운데 금칠을 한 약사여래상이 지불이다. 지불이란 종이를 짓이겨 만든 부처상을 말하며, 국내 유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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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춤을/ Dances With Wolves 리뷰(역사) + 동영상과 음악

1990년/제작+감독+주연: Kevin Costner/ 출연; Mary Mcdonnell +

Graham Greene/음악: John Barry /236분(감독 판)


The John Dunbar Theme.

26360


슈마니투통카 오브 와시테(Shumanitutonka ob Washte)

수우(Sioux) 족의 말로 ‘늑대와 춤을’ 의미하는데,
주인공, 던바 중위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발로 차는 새’,
(‘Kicking Bird’ 역의 Graham Greene/1952, 캐나다)
참으로 시인같이 낭만적인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같은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또 나쁘게 보이기도
마련이지만. 평원에서 늑대와 뛰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그것을 좋은 의미인
춤으로 해석하였으니, 그 어찌 고운 마음씨의 소유자가 아니겠는가?(아래 사진)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고 의리가 있는 우호적인 인디언으로
등장을 한다. (이 ‘Kicking Bird’역시 실제로 존재하였던 인물이었음)



그러나 우리들의 주인공,
존 던바(John J Dunbar/Kevin Costner, 1955, 미국 CA)
중위는
상당히 별난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 물론 영화이니까 그렇겠지만)
우리나라의 속어로 하자면 ‘O 라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기행을 거듭하는데,
남북전쟁이 치열한 동부전선의 최 일선에서 양군이 대치한 사이를 말위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린다던가, 또 일종의 포상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중서부 쪽 최전방 요새를 자원하는 일,
그리고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되돌아갔을 뻔한 텅 빈 그 요새에서 혼자서 몇 달씩을
보내고, 또 죽는 건 별 거 아니라는 듯, 겁도 없이 인디언 마을 을 찾아나서는 등.
그는 분명히 별나다. 그러나 이런 그의 별남이 오히려 그를 대자연과 쉽게 동화 되게
하였고 또 그 대자연속에 사는 인디언의 삶을 바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1863년,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때(위의 사진), 그는 발에 부상을 당하고 야전병원으로 실려
가게 되나, 무조건 다리를 절단하려는 모습을 보고는, 그냥 뛰쳐나와,
죽을 각오로 무작정 말을 타고 적진 앞을 달리는 기행을 벌리는데, 오히려 이일로
영웅이 되면서 그 포상으로 가고 싶은 요새를 선택 할 수 있는 행운을 얻는다.
그리고 도착한 중서부 최전방인 다코타(Dakota) 의 세즈윅(Sedgewick )요새.
인디언들에게 아무 때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가려고 하지를
않는 이곳이 그러나 이 별난 던바 중위에게는 오히려 천국이 된다.
요새도 수리를 하고 일기도 쓰면서 대자연과 벗 삼아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에게
흰 발을 가진 늑대(‘White Socks’ 라고 명명함)도 친구가 된다.
그리고 말을 훔치려온 수우 족 인디언들과도 차츰 차츰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기다리던 증원군은 오지를 않고, 세월만 흘러가자, 드디어 그는 주변도
정찰할 겸, 수우 족 마을을 향해 길을 떠나게 되는데,
‘주먹 쥐고 일어서‘(’Stands With A Fist‘/ Mary Mcdonnell,1952, 펜실바니아)
라는 여자를 중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포니 족에게 백인 부모가 학살당하면서 고아가 된 그녀는 수우족의
‘발로 차는 새’의 양녀가 되어 자라났는데, 약간의 영어실력으로 이후 마을에서
통역관이 되기도 한다.
겨울동안 먹을 양식인 버팔로 사냥을 함께하면서 점점 그들과 동화되어가는 던바는
결국, ‘주먹 쥐고 일어서’와 결혼을 한 후, ‘늑대와 춤을’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게
된다.(아래 사진) 그리고 겨울이 오자 그들과 함께 남쪽의 따뜻한 네브래스카 의
겨울 캠프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깜박 잊은 일기장을 가지러 요새에 잠깐 들른 그는 요새에 새로 온 증원 군들 에게
그만 잡히고 또 배신자로 낙인이 찍힌다. 그리고 그런 그를 이용하여 인디언들을
토벌하려는 미 제7기병대, 나중에 그는 수우 족에게 간신히 구출은 되지만
자기 때문에 겨울 캠프의 온 부족이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는 아내, ‘주먹 쥐고 일어서’와 단둘이서만 멀리 떠나려고 한다.
떠나려는 그에게 추장인 ‘열 마리 곰’(‘Ten Bears’) 은 오랫동안 보관해 왔던
스페인 군인 투구를 보여주며 이런 말을 한다.
“스페인 군인들도 멕시코 군인들도 모두 물리쳤건만, 백인들은 계속 밀려오고
있으니 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막아야 할까? 그리고 이제 미 육군, 던바 중위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우리와 같은 인디언인 ‘늑대와 춤을’ 만이 존재할 뿐인데,
싸워도 같이 싸울 일이지 왜 자네는 떠나려 하는가? “

그러나  영화의 끝 장면에서는 엄청난 수로 몰려오는 기병대의 모습을 통하여
이 수우 족의 앞날의 운명을 대신 말해준다.(실제로 당시 이 중서부 대평원은
인디언들에게는 마지막 보루 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자막,

“이들은 13년 후, 결국 네브래스카의 로빈슨 요새에서 항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용맹한 그들은 역사 속에 묻혀갔다. “



1980년대에 시나리오 작가이자 절친한 친구인 마이클 블레익(Michael Blake/1945)
의 원작소설을 읽고 감명을 받은 케빈 코스트너는 이 작품을 영화화 하기위해
몇 년 동안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말리는 사람들만 있을 뿐, 별 성과가 없자
본인이 직접, 제작(공동)과 감독을 하게 된다.
마치 20년 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도 같은 입장이었는데, 연기 이외에는 모든
작업이 다 데뷔를 하는 입장이었던 걸 감안한다 해도,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로버트 레드포드와 수평 비교를 한다 해도, 그 결과는 참으로 대단하고 엄청난
성공이었다.
물론 흥행은 말할 것도 없지만, 1991년도 아카데미에서 무려 7개의 상을 휩쓸었으니
(굳이 서부극으로 분류하자면) 서부극으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영예(공동)를 안은 작품
이 된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 작품을 꼭 서부극으로만은 볼 수가 없다.)



시종일관, 경치가 장관인 이 영화의 실제 촬영도 사우스 다코타의 광활한 대평원에서
이루워 졌다는데, 무려 3000마리의 버팔로를 풀어놓고 그 스펙타클 한 사냥 씬을
찍은 역량도 참 대단하지만, 전체적으로도 4시간(감독 판)이라는 긴 대작을 지루하지
않게끔, 적재적소에 여러 가지 사건들을 적절히 잘 배합한 연출 솜씨, 역시, 결코
초보감독 답지가 않다. 물론, 당시로서 그는 이 작품에 올인 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
였지만, (공동)각본에서부터 편집까지 너무나 많은 작업에 관여를 하였기에 마치 그의
일인 극이나 마찬가지라 할 정도로 이 작품에는 코스트너의 모든 것 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노력들의 보상으로 그는 1982년에 영화계에 입문한 후, 거의
10년 만에 영화인으로서 최고의 해를 맞이하게 되었고, 이후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제작자와 감독으로서도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을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성공 이상의 성공도 더 없음을 보면 과연 이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
졌는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전체 영화음악(OS)을 영국 출신의
존 배리(John Barry/1933, 요크)
에게 의뢰를 한 것이야말로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경치도 장관인 영화이지만, 그 영화음악을 들으면 절로 장관(?)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존 배리의 음악은 출중하다.
대자연의 풍광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웅장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버팔로 사냥을 끝내고 돌아가는 인디언들을 쓸쓸하게 배웅하는 장면 에서는
무척이나 애절하게도 들리는,


초반부터 여러 스타일로 변주가 되어 여러 번 반복이 되는데, 관악기(웅장함)와
현악기(섬세함)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이 기막힌 Theme을 만들었고 또 작품자체를
전체적으로 고급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부터 007시리즈로 갈고 닦아온 그의 실력은, 이 OS와 비슷한 분위기를
주는 ‘Out Of Africa’(1985) 에서 꽃을 피운 후, 드디어 이 영화에서는 절정을 맞이
한듯 한 느낌이다. 그 역시 그가 만든 150여 편의 영화음악 중, 이 OS를 대표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어쩌면 영화 역사상 장면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 베스트 텐을 꼽는다면 반드시 빠질 수 없는 음악이라고 할 정도의 걸작이다.


여지까지 만들어진 영화들 가운데에서 이 영화만큼 인디언들의 실생활 언어가 많이
등장을 한 작품도 없는 듯한데, 자칫 흥행의 실패 요인이 될 수도 있는 이 언어 문제
에서(다들 영문 자막보기를 싫어들 하니까)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을 부린 것도
다 그 만큼 코스트너의 속마음이 깊다고 할 수가 있겠다.
특히 ‘늑대와 춤을’이 마지막에 구출이 될 때, 미 육군은 관객들에게 이미 적군이
되어있게끔 한 의도적인 연출역시 시사 하는 바가 매우 큰데, 이는 피터 스트라우스와
캔디스 버겐이 주연한 1970년도 작품, ‘Soldier Blue’(Ralph Nelson 감독)나
더스틴 호프맨이 대단한 연기를 펼친 같은 해의 ‘Little Big Man’(Arthur Penn 감독)
보다도 훨씬 더,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과거의 인디언 원주민정책이 잘못되었음을
대중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영화 속에서 던바 중위는 수우 족을 찬양하는 독백을 여러 번 하는데,
머리껍질을 벗기는 무지막지한 살인자들로만 묘사되던 과거의 서부극들과 비교하면
참으로 엄청난 역사 바로 잡기 임에는 틀림이 없다.
바로 이런 점들이 이 영화를 단순한 서부극으로만 볼 수 없게끔 한 이유들이 되는데,
오늘날 미국 문화의 오피니언 리더격 인 할리우드 유명인사들 가운데 이렇게
인디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100% 검증된 사실은 아니겠지만,

먼 옛날, 우리와 같은 몽골계열의 많은 아시아인들이 계속 동북쪽으로 이동을 하여
에스키모도 되고 또 어메리칸 인디언(남미 포함)들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도
몽골반점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의 이야기는 영, 남의 일같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마, 우리들같이 반만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들 이었을텐데,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한 순간에 다 망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뭣때문에 수우 족이니 포니 족이니 하며 같은 동족끼리 서로 죽이고
싸웠는지... 그 시간에 서로 뭉쳐서 외세의 침입에 대비를 했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도 이 영화를 보면서 떨칠 수가 없다. 아직도 Indian Reservation 이라는 곳에서
형편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21세기의 비참한 현재를 얼마 전에 다큐멘터리로 본적이
있지만, 주 정부에서 주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술, 마약 등을 사기 바쁜 그들,
과연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이라는 것이 있는 것 일까?
흑인들의 지위향상을 이룬 마틴 루터 킹 같은 지도자가 이들에게도 하루 속히
등장하기를 간절히 바랄뿐이다.


주) 수우 (Sioux)족 원주민의 19세기 실제 역사(당시 인구: 약 27,000명):


*1851년, 서부로 가는 백인들에게 통행의 안전을 보장하는 첫 번째 조약체결.
(라라미 조약)/토지소유권인정/1855년경 백인들이 이 조약을 파기함.
*1868년, 두 번째 라라미 조약체결, The Great Sioux Reservation을 인정함.
*1870년, 보호구역내의 금광발견으로 또 다시 전투가 발생
*1874년, 조지 캐스터 장군 출동함
*1876년, 몬태나의 Little Big Horn 의 전투(미 제7기병대 vs 크레이지 홀스)
*1890년, 사우스 다코타의 보호구역내에서 몰살당함


주) 미국의 원주민을 편의상 (보편적으로 알려진) 인디언이라고 표현 하였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사우스 다코타에 있는 수우 족의 전설적인 추장, ‘크레이지 홀스’
기념 상(Crazy Horse Memorial/흰색)인데, 그 뒤로 크나 큰 바위에다 이 기념상을
확대 재현 하기위해 발파(얼굴 아래 부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콜작 지올코프스키(Korczak Ziolkowski)라는 자가 1948년에 시작한 이 방대한
규모의 조각공사는 1982년에 그가 사망을 하므로서 이렇게 얼굴모습만 완성이 된 채
한 때 중단이 되었는데, 그의 열 자녀들이 아버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최근에 다시
공사 재개를 하였지만, 아버지가 그려놓은 말 머리(사진의 우측)를 포함하여 전체적인
완공까지는 앞으로도 몇 백년이 더 걸릴지 모른다고 합니다.




* 아래 동영상 은 예고편입니다.


* 아래 사진은 19세기에 실제로 찍은 수우족의 평화로운 마을 일부모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