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호남권

전북 마이산 673m. 이갑룡도사의 불가사의한 탑사

by 창 포 2008. 3. 3.

 

마이산  (673m)  전북진안군 

 


동행 : 춘천 와라바라산악회

   날짜 :  2008년 3월2일.

  황사가 약간있고 쌀쌀한 봄날씨

 


  10시 32분.

춘천에서 06시출발 ~~ 이곳 전북 마이산 남부주차장에 도착.

단체사진 준비중.

 

 

27097


 


 

 

마이산 남부주차장.

 산 중간 솟은곳이 정자(비룡대)가 있는곳

 

 

 

 

 산불조심 통제기간이라  북수골에서 광대봉을 거쳐 탑사로 가는 산행길을 남부주차장으로 변경된다.

 

 

 

 

 

 

 

 

남부주차장 ~ 고금당 ~ 전망대 ~ (비룡대) ~갈림길 ~ 마이산탑사 ~ 숫마이산~ 은수사 ~ 화엄굴 ~ 북부주차장

 

 

 

 

입구에 서있는 나무가 엄청크다. 그런데

집에와 사진을 자세히보니 나무에 수건을 걸어 놓은것처럼 보이긴한데...

설마 나무에 못질을 했겠나싶다...

 

 

 

 

 

 

 

 

 

                                                         멀리 그림처럼 올라가는 그림들..

 

 

 

 

 앞사람을 그냥 따라오다보니  고금당  을 지나쳤다. ㅋㅋ

아는순간 되돌아 갈려다가는... 그냥가자 나중에 또오면되지 그만 접는다. 

 

 

 

 

  가야할 비룡대가 보이고.

 

 

 

뒤돌아보고... 비룡대 아래에서 바라본 고금당..

 

고금당 나옹암 ( 나옹 선사가 수도한 자연암굴 )
마이산 주능선 상 비룡대 서쪽 500m 거리에있는 자연 암굴로, 고려 말 고승 나옹 선사의 수도처라서 나옹암이라 한다.

 원래 금당사가 터를 잡았던 곳이기 때문에 고금당(古金塘)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고 있다.

속성이 아씨고 밥명이 헤근인 나옹(1320~1376)은 20세에 출가해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서 득도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인도승 지공화상으로부터 법을 받아 1358년 귀국해 고랴 불교 중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나옹은 1371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다. 보우, 무학 등이 나옹의 제자다. 토굴가 등 많은 시와 가사를 남기고

경기도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암마이산과 숫마이산 

 

 


 비룡대

 



 

 

 




 

 






 

정자에서 우리가 올라온 남부 주차장이 보이고...

 

 


 

 



 

 


 

 





 

 


 

 

 

 뒤돌아본..

황 사








 


 

 


 

 


 봉두봉

 





 

등산로 옆으로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으로 내려다보니.

커다란 두 바위산이 양쪽으로 갈라진게 조금 더가면 낭떠러지 처럼 보였다.

 

 

 

 

 





 

 

 오후1시.

오늘 등산은 산책나온 기분으로 여기서 1차 마치고 (2시간30분)

마이탑과 은수사 경내로 들어간다.

 

 

 ---------------------------

 

 

 

마이탑과 은수사 ( 은수사 경내의 80여 기 돌탑군 )


암마이봉 아래에 숫마이봉을 바라보고 앉은 사찰이다. 보물처럼 여기고 있는 몽금척도와 금척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다.
은수사 경내에는 이성계가 먹다 뱉은 씨앗에서 싹을 틔었다는 청실배나무(천연기념물 제386호)도 있고, 이성계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은수사는 또 겨울철 하늘을 향해 뻗쳐 어는 '거꾸리고드름' 으로도 유명하다.
마이산 석탑은 은수사 경내에 있는 80여 기에 달하는 신비감을 더해주는 석탑군을 말한다. 천연기념물(제35호)로 지정된

이 석탑군은 이성계가 억센 지기를 누르기 위해 쌓았다는 설과 몽골군이 쌓았다는 설도 있지만, 오대산에서 수도중이던 이갑용 처사가 1885년  신의 계시를 받고 이곳으로 들어와 30여 년에 걸쳐 솔잎으로 생식하면서 낮에는 기도하고, 밤에만 정상을 바쳐 쌓았다는

얘기가 가장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 처사의 정신이 어려있는 석탑은 폭풍이 몰아쳐도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자 : 갑룡 호 : 석정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 갑룡이라 한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 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혀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바닦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셨다.
 
아주 어릴적에 갓 돐을 넘기시고 제사날에 조상 제사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 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 경의를 이길자가 없었다 한다.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 하실 때 이 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달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짖고 3년동안 시묘 살이를 하시다 인생의 삶과 죽음의 인생 허무무상을 탄식 하시다가 19세때 시묘 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 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 의 산과의 대화요,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어느곳에 비 할 수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 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 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층씩 30여년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 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 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임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 할때 산항에 기도하고 돌아올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 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 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 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때 쿳숀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 인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 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위벽에 붙어있는  능소화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 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이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픈이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겉든 이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 마이봉과 수 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수 있겠다.
 

 

Tell: 063-433-0012, Fax:432-0072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8 마이산탑사
     Copyright ⓒ 1999 by MaiSanTapSa.co.kr reserved Made in

 

 

 

 

 

 

 

 

 

 

 

 

 

 

 

 

 

 

 

 

 

 

 

 

누군가가 숫마이봉 보고 원형 탈모증에 걸렸다고 합디다...ㅎ

 

 

    

 

 

 

 

 

 

 

 

 

 

 

 

 지나가는 누구나 보이는 저 북을 칠수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3 번씩 북을치며 소원도 빌었겠지요.

저도 북을잡고 3번을 쳤습니다. 소원은 우리가족 모두 건강을 항상 빕니다.

 

 

 

 

 

 

 

 

 

 

안에서 밖을 향하여

 

 

 

 

 

 

 오후2시20분. (약 4시간)

마이산과 마이탑 은수사 답사를 마치고 북부 주차장에 도착.

처음으로 와본 마이산은 역시 소문대로 본대로 마이산 탑사가 압권이었습니다.

촘촘히 쌓아올린 탑들.

그오랜 100 여년의 세월을 흔들림없이 서있다는 탑.

신비스러울만큼 감탄을 하였지요.

절대로 손으로 만지지 말아달라는 문구도 있구요.

혹~ 스치다 건드리기라도 할까봐 저절로 몸가짐도 되구요.

조심조심 천천히 한바퀴 경내를 돌고 내려왔습니다.

 위에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가까히 사진으로 잘 안들어와

사진을 남기지는 않고  눈으로 가득 담아 왔습니다.

 

        끝

 

 

 

 

 

 

 

 

      아래사진 클릭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