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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크랩] 그녀, 김수임 이야기

by 창 포 2007. 12. 4.

 

김수임(뒷줄 오른쪽)과 모윤숙(뒷줄 왼쪽)이 1945년 일본의

디자이너 노라노(앞줄 가운데)씨 가족과 함께 한 기념촬영.

 

김수임은  1911년 3월 1일 개성 선죽교 아래 빈민촌에서 태어났으나
곧 아버지가 돌아 가시자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 집안은 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해 11세에 민며느리로 15세의 신랑에게 팔려 갔다.

 

명랑하며 솔직한 소녀였던 그녀는 철 없는 신랑의 횡포를 못 이겨 가출, 예배당에 들렀다가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상경해 새 세계를 알게 된다.
당시 미국인 독신녀의 양녀로 성장한 그녀는 이화여전 영문과에 들어가 작가 모윤숙과
기숙사 룸 메이트로 지냈다.

 

타고날 때부터 한스러웠 김수임의 삶은 이때부터 더욱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1929
, 김수임은 시인 모윤숙의 소개로 경성제대 법과 대학생이던 이강국을 처음 만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강국이 공산주의 활동으로 함흥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


모윤숙 - 오른쪽 사진은 1950년 11월 8일 모윤숙이

북한군의 서울함락 당시를 회고하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이다.

 

 

친 자매처럼 지내던 모윤숙을 따라 감옥에 있는 이강국을 만난 김수임은 이 날,
비범한 남성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이튿날부터 김수임은 뜨개질을 시작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됐다.

 

두 사람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위해 함흥에 머물고 있던 이강국의 조강지처를 위로 방문까지 했다고 한다. . 여간첩, 심지어는 탕녀라고까지 매도되던 김수임이 실은 얼마나 단순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 분단과 냉전이 인간을 어떻게 희생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25년 3월 6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이강국(우측 상단 사진)의 보성고보 수석 졸업기사.

이강국은 1930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 판검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한 인물으로서 '서울 1945' 최운혁의 모델이다.

 

이강국은 1906년 경기 양평의 몰락한 사대부 집안 차남으로 쾌활하고 저돌적이었다.
마침 옆집에는 뒷날 시인이 된 임화가 살고 있었다.  친구였던 그둘은  일본제국주의
붕괴를 위해  사상과 생사를 함께 한 동지였다.

 
 

키 크고 호남형의 이강국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 축적론’을 두고 열변을 토했는데, 
김수임은  한 독서회에서 그의 명강의를 접하고 흠뻑 빠져 들었다.
김수임은 모윤숙에게 “로자가 여성이어서 더 호기심이 당긴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

 

이강국은 그러나 이중 첩자로 내몰릴 운명이었다. 국제적 식견과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문장가이자 웅변가였던 그는 북조선의 정적들로부터는 남조선에서 친미파로
활동했다고 오해 받았다.
반면 남조선에서는 김일성의 충성파로 분류돼 일거일동을 감시 받았다.
그를 잘 아는 주변에서는 포용력과 겸손 등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으로 평가해 10년후의
대통령감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이강국(李康國·1906~1955)

김수임은 영어에 능통하고 음악에 재질이 있었다.

해방이 될무렵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장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페렴에 걸린
이강국과 세브란스 병원에서 16년만에 재회하게 되었다.
그사이 이강국은 독일 유학을 다녀왔으며 아내와는  사별을 했다 .
"함흥 형무소에서 당신을 만난후, 한번도 잊은 적 없다"는  이강국의 말에
감격했다. 그들은 잠시 동거를 시작했고 이강국은  평양으로 보름간 다녀오겠다며
떠난 후 1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김수임이 1930년대말 세브란스병원 근무 당시 자신의 상관인 치과과장 부스 박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미국은 베어드 조사보고서에서 김수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2장의

사진을 첨부한 뒤 "알려진 것(대단한 미인)과 실제의 외모는 차이가 있다"는 논평까지 붙였다.


이강국이 떠난지 1년이 지나는 동안 김수임은 직장을 반도호텔로 옮겨
통역일을 하던중 미 헌병대장 베어드 대령(8군사령부
헌병감)을
만나게 되고 그의 구혼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옥인동 부근에 살림을
차리고 살면서 아들을 낳았다.


해방정국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간첩 김수임. (오른쪽)

최근 미국측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사건도
크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부풀려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삼팔선을 사이에두고 남과 북의 대치상황이 긴박할 무렵, 어느날 
김창용 특무대장의 수사망이 좁혀들었는데,  그들은 실력자인 베어드 집을 수사할 수
없어 모윤숙 집으로 김수임을 유인하여 체포하였다.

당시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는 무려 19가지였다.
골자는 동거중이던 베어드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내 애인이었던 이강국을
통해
남로당에게 건네주었다는 . 구체적으로는 46 6 김수임이 베어드 대령의

지프로 이강국을 개성까지 데려다 주었다거나
,
47 12 이강국이 남로당에 보낸 정치자금을 땔감을 가장, 베어드 대령이 제공한

군용트럭으로 서울로 옮겼다 사실 등이다.

전쟁 발발 10여일전인 6 14∼16일까지 진행된 재판은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1950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사형수였던 그녀는 당초 예정일보다
이틀 앞당겨 6 28(미군 기록임) 형이 집행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해방공간에서 유명한 소위 '김수임간첩사건'으로 그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에게 붙여진 죄명은 국방경비법 32 '간첩이적행위'였다




여간첩 김수임-전숙희 작


모윤숙은 “종달새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명랑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던 수임이가
공산주의에 물든 것은 아니다”며 “간첩 행위에 해당하는 일을 저지른 것은
이강국에 대한 첫사랑 때문에 피동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며
명 변론을 펼치기도 했다.

 

모윤숙 시인의 구명 운동에도 불구, 6월 16일 벌어졌던 마지막 재판에서 법정은
사형을 언도했다. 재판장이었던 김백일 육군 대령은 “한 남자에 대한 애정이 간첩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요지였다.

 


 1950년 6월 28일 오후 7시 47분,

김수임이 6월의 노을 빛에 취해 있는 동안 사형 집행관은 사수들에게 손짓으로
발사 명령을 내렸다
. 순간, 다섯 발의 총알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명중했다.
그녀의 머리는 앞으로 꺾이고 심장에서는 선혈이 분출한다.
죄목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나이는 서른 아홉살. 
여간첩 김수임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강국은 북한의 정적들에 의해 6ㆍ25 전쟁 패전을 구실로
1955년 12월 10일, 북한에서 총살된다. 김수임에 빠져 미 군정의
간첩 노릇을 했다는 죄목으로 숨질 당시 그의 나이 49세. 젊은 시절부터 키워 온
애국의 꿈을 펴보지도 못 한 채 분단 한국의 희생양으로 그의 생은 끝났다.


김수임은 베어드와의 사이에서 아들(김원일, 51, 미국 라시에라대학 신학과 교수)

하나 두었는데(베어드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고서에서 주장함), 김수임이

제왕절개수술을 받은 청량리 위생병원의 간호사였던 안귀분씨와 부군인 김덕신씨가 입양
,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미국서 성장했다. 그는 지난 97 연극 ', 김수임' 제작팀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동안 한국의 매스컴을 회피해 왔으나 2005, 2.11 KBS 인물현대사팀에게
취재를 승낙하면서 그 동안 김수임에 관해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공개하고,
자신의 어머니인 김수임과 한국현대사에 대한 진솔한 생각들을 밝혔다

그리고 KBS 취재팀은

이화여전 후배들(김태임, 95세, 미국 LA / 전숙희, 85세, 前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1930년대 세브란스 병원 동료(이양숙, 92세, 미국 샌디에고), 그리고 이복 여동생(김정임, 89세, 경기도 용인) 등이 증언하는 김수임의 어린 시절과 학교 생활, 취업과 일, 그리고 이강국 및 베어드 대령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었다.  

 

 

<, 김수임>이라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을 , 미국에서 김수임의 아들이 한국을 찾았다.
김수임이 총살당할 백일이었던 바로 아기가 벌써 오십대가 가까워서 나타난 것이다
.

김수임과 미 군정 헌병사령관 베어드 대령 사이에 태어난 유일의 혈육 김원일(53)씨는
1969년 도미해 신학을 공부하여  교수이자 목회자 이다.  KBS 인물현대사의
김수임 편에 출연한 그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깊었다.  그리고  그는
의식이 있는 훌륭한 인물로 자랐음이 느껴졌다.

 

‘나, 김수임’은 여간첩이란 통념을 뒤집고 김수임을 여인으로 환생시킨 무대였다. 해방 전후 최고급의 엘리트로 손꼽혔던 이강국과의 사랑앞에 모든 것을 포기한 순애보적 주인공이라는 기본 시각에 인기 배우 윤석화의 열연이 운을 맞췄다.

 

공연 당시 극장을 찾은 김원일씨를 만났던 작가 정복근씨는 “어머니의 일로 괴로움을 많이 겪었음에도 불구, 아픈 역사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가 매우 깊은 인물이었다”며 “예상과는 달리 유창한 한국어가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정씨는 “김수임을 이중 스파이로 매도해 한국의 마타하리라고 도식화한 통념은 역사의
폭력”이라며 “그녀는 익숙치 않은 서양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한국인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다. 김수임은 서구의 이념에 휘둘린 한국의 아픈 역사를 반성하는 계기라는 것이다.

김수임 사건은 살벌한 냉전시대에 국가가 개인에게 저지른 횡포요 비극이었다.



소프라노 조수미




출처와 참고: 장병욱 차장 aje@hk.co.kr,  KBS 인물 현대사, 전숙희 작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  SBS '서울 1945'
 www.khistory.or.kr,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출처 : wandervogel
글쓴이 : 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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